Friday, August 9, 2013

신앙은 이상주의적으로 가지 않아야 합니다.(몸이 무익한 것으로 취급되는 것이 아니라 몸에 우리의 믿음이 실려서 신앙이 들어나야 한다. 결국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삶의 변화나 행동의 변화가 없이는 교육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영과 육체를 분리할 수 없는 준재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인간의 영역에서 회복되어야 하고 그 분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고린도전서 096 / 몸의 변화 / 고전 15:35-44 / 1993.07.21
고린도전서 96 / 몸의 변화 / 고전 15:35-44 / 1993.07.21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이 설교에서 부터

"신앙이 이상주의로 가지 않고, 우리가 갖고 있는 어떤 선한 의도와 일들을 행하는데 방해가 되는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 내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선행과 열심과 우리 마음속에 있는 주를 향한 어떤 충성심을 다 이루기 위해서 어떤 방해 요소들이 없이 좋은 조건들만으로 완성되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지도 않고 신앙의 가장 좋은 환경이나 방법이라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이상주의 속에는 내 육체가 약해서 내 마음의 소원하는 것을 하지 못한다라는 사고 방식이 어떻게 많이 만연되어 있느냐면, 제일 많은 게 이거예요.
목사님이 완전하다면 이런 사고 방식입니다.
....
이거는 성경이 이야기 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교회안에는 전혀 이견이 없고, 우리를 시험하는 사건이나 사람이 없고, 시대도 우리를 편들고, 우리도 시대를 주도하고,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무슨 성도들이 요구하는 것들 중에 이런 것들이 많아요.
교회가 ..

교회는 어디 있어야 하냐면, 필요로 하는 사람들 속에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있고, 거기 하나님이 부르신 영혼이 있고, 그들이 쉽게 달려나와 영적인 가르침을 받고 인도함을 받는데에 가장 적합한 곳에 있어야 합니다. 외적인 모습이나 기구나 다른 무엇보다도 그런 편리한 곳에 있어야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얼마나 커야 되느냐? 그건 아브라함링컨이 이야기한 것이 답입니다. ..

교회는 얼마나 커야 되는가? 거기 나오는 성도들이 와서 앉아서 예배볼만큼만 크면 됩니다...

교회안에 이런 것 저런 것이 없었으면 좋겠다. 우리 교회는 이렇고 저랬으면 좋겠다. 이런 것들은 다 우리 안에 가진 순진한 생각과 고결한 이상이 힘을 갖지 않고도 난관을 극복하지도 않고도 쉽게 이루어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응석입니다. ..

첫사랑을 이룬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왜 그러죠? 그 때는 첫사랑이라는건 목숨을 걸고합니다. 젊은 날에, 그런데 왜 안 이루어지죠. 열심이 없어서도 아니고, 진지하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그들은 사랑을 이룰 만큼 지혜와 실력과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얼마나 진지한가 소원과 열심과 그 희생정신을 갖고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이룰 실력이 있어야 됩니다. 영육간에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안됩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처음부터 무엇을 창조하셨고, 무엇을 목적하셨는지 놓치지 말란 말이예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지으셨어요, 진흙을 빚어 지으시고, 우리에게 온 천하 만물을 지으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뜻이고 우리에게 허락한 복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놓고 나면, 구원과 내세를 향한 모든 목표가 이상주의가 되고 관념론으로 흐르게 됩니다. 그럼 사실이 문제가 아니고 도를 깨우치는 것이 문제가 되고 깨우치고 아는 것으로 끝날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안계시냐가 아니라 선과 의로 갈 위험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앞으로가 아니라 선으로 가는 것, 의로 가는 것, 도덕이 되어버릴 수 가 있고 득도하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

그 중에 하나가 도벽이 있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 아무개가 도둑질을 했는데 왜 했느냐고 물어봤는데 여름 수양회를 가고 싶은 데 수양회비가 없어서 훔쳤다고 하더랍니다. 이녀석을 데리고 가야 됩니까? 안데려가야 됩니까? 라고 저한테 물었습니다. ...

데려갈 수 없다. 그 물은 학생이 반문했어요.
기독교는 회심을 시켜야 하는 종교고 사랑을 해야 되는 종교아닙니까? 어떻게 안데려갑니까?
그래서 제가 얘기 했죠.
그를 회심시켜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도둑놈 하나를 위해서 나머지 사람을 희생시킬 수 는 없다. 우리는 혼동해요 아흔아홉마리양을 우리에 나두고, 한마리 양을 구하러 가는 것은 아흔 아홉이나 됐다고 해서 만족하지 않는 다는 뜻이지 우리에 들어 와 있는 아흔 아홉마리보다 음침한 골짜기에 가있는 잃어버린 양이 더 귀중하다는 뜻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쯤 없어지면 어떠냐 이런 마음은 아니라는 말이죠. 그는 지금 도벽이 있습니다. 그를 데려가서 나머지 학생들의 신앙생활을 분명히 방해시킬 것을 우리가 그대로 방치할 순 없습니다. 그를 따로 기회를 주고 교화시키고 지도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나 같이 섞을 수는 없죠...



지금 신앙새활에서 우리의 정신과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사고와 열심을 몸으로써 나타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로마서 12장1절

진심이전에 몸이예요. 진심을 몸에 실어서 보내세요. 예의를 지킨다는 것,, 그런 것들은 실력입니다. 우리는 형식주의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형식이 없이는 내용을 담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가진 진심이 형태로 나타나지 않으면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크게 시험을 받는 것은 뭐냐면 ....

우리가 진심을 가지고도 진심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요.
모두가 표정을 말을 좋게 하는 연습을 하셔야 행동이 좋아집니다. 말과 표정을 좋게 지으시고, 행동을 바꾸세요. 예의를 지키세요.

Wednesday, August 7, 2013

능력있는 사람의 조건; 교육의 목적은 능력있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세상과 성경은 다른 능력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교육의 목적도 달라야 한다. 그렇다면 그 능력은 어떻게 기를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는가? 또 그런 사람의 인격은 어떻게 다른가?

출애굽기 18장에서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모세에게 조언한다.

일의 중함으로 필경 백성과 모세 자신이 지쳐버릴 것을 안 이드로는 모세에게 일일이 재판하며 개개인에게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가르치지 말고 백성과 그에게 유익한 조언을 해준다. 19

첫째, 지금까지 해 왔던 바른 신앙관을 유지 하라는 것이다. 방법이 바뀐다고 근본 원리가 바뀌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You must be the people's representative before God and bring their disputes to him."
너는 하나님 앞에서 그 백성을 위하여 그 사건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며 19

기본적으로 하나님앞에서 판단하며 하나님의 기준으로 처리해야 하는 일임을 분명히 한다.

둘째,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가르치도록 조언한다. 그래서 그들이 갈 길과 할 일을 알게 하는 것이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가지고 와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먼저 하나님의 자녀가 살 길과 방법에 대해서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Teach them the decrees and laws, and show them the way to live and the duties they are to perform.20그들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그들에게 보이고

마지막으로, 능력있는 사람들을 세우라고 조언한다.

너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능력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살펴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그들이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 큰 일은 모두 네게 가져갈 것이요 작은 일은 모두 그들이 스스로 재판할 것이니 그리하면 그들이 너와 함께 담당할 것인즉 일이 네게 쉬우리라 21-22

백성을 다스리는 일은 이스라엘 민족의 흥망성쇠에 관한 것이었다. 따라서 가장 능력있는 사람을 선택해야 했다.
capable men to judge 현대에도 판사들은 지적이며 매우 뛰어난 판단력과 학식을 요구한다.

그런데 그 능력있는 사람의 조건은 학식도 아니요, 논리적 판단력을 겸비한 지적 능력을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

men who fear God, trustworthy men who hate dishonest gain 21

이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knowledge." (잠1:7)의 말씀에 의해서 능력있는 사람의 조건을 분명히 하게 된다.
잠언 9:10절은 이를 또한 뒷받침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wisdom, and knowledge of the Holy One is understanding."

능력있는 사람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지혜와 지식의 근본을 아는 자요, 명철을 가진자다.
이것은 우리가 능력있는 사람을 소원하는 교육을 생각할 때 꼭 명심해야하는 우리의 목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능력있는 사람이 되길 원하지만 그것이 지식과 기술을 겸비한 뛰어난 학식을 가진 사람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이야기 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요, 지식이라는 것을 그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따라서 우리 교육의 목적은 우리의 자녀들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되도록 돕는 것이다. 어떻게 그들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될 수 있을 까?
성경의 인물들은 어떻게 그들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되었나?
먼저 누가 여호와를 경외한 인물이었나?
그리고 그는 어떻게 그렇게 되었나?
부모의 역할은 무엇이었나?
그들의 인격은 어떠했는가?
그들의 삶은 그렇지 않은 자들과 어떻게 달랐나?


Monday, August 5, 2013

자존심

박목사님 설교로부터 ,

고린도전서 92 / 십자가 / 고전 15:8-11 / 1993.06.23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자식을 위해서 믿는 부모들이 기도를 할 때 우리 자식을 엘리야 같게 하시고, 에스더 같게 하시고, 다니엘 같게 하시고, 이런 식의 기도를 너무 자주 하는 데 성경에서 그런 사람들은 결단코 그 개인의 총명이나 뛰어남을 그리기 위해서 그 사람들의 일생을 기록하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연약한 사람들을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사랑과 은혜와 돌보심과 그로 부터 나오는 모든 진리와 생명을 증명하는데 우리가 쓰임받는 것을 복으로 따지고 있지 어느 인간이 어느 인간보다 낫다는 이야기를 하는 데는 전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십자가 앞에 섰을 때 맨 처음 처리해야 하는 것은 바로 자존심입니다. 어느 신자도 결국 자기의 신앙을 점검할 때 맨 처음 물어봐야 하는 건 자존심입니다. 내가 자존심을 얼마나 많이 처분했는가? 자존심이 처분되어 있지 않다면, 그래서 어떤 문제고 아직도 양보할 수 없고 그 문제에 관해서 아직 분통이 터지는 일이 있다면 그는 아직도 십자가 앞에 서는 일을 배우지 못한 것이 됩니다.

빌립보서 3:4
그러나

부활의 권능에 이르는 길은 그의 고난에 참여하지 않고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신자가 가진 모든 신앙은 그 신자가 가진 어떤 특권과 능력도 그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과해서 얻은 것이라면 그는 예수그리스도가 그를 대신해서 죽어야 만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죽은 자가운데서 부활에 이릅니다. 산자로서 부활에 이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죽어 마땅한 자요, 죽은 자라고 평가해야될 자리로부터 우리의 신앙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누구의 앞에서도 자신이 낫다고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큰 특징중의 하나가 그래서 겸손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사람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고 어떤 놀림을 받는다 할 지라도 우리는 더 이상 세상적 차원에서 평가하지 않고 하나님앞에서 우리를 평가해야 하고 세상이 어떻게 나를 대접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대접하느냐로 자신을 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신자는 겸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딤전 1:12-5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사도바울은 자존심이 있었나? 자존감이 있었나? 그의 자존감은 자신의 능력으로 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부터 온 것이다.
못난이로서의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본이 된다. 자기를 증명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증명하는 삶으로 간다.
우리가 자존감을 가지고 나누려고 또 그것을 얻으려고 나누려한다면 결국 나를 드러내는 나눔이 되는 것 아닌가 ?
우리는 사랑을 받은 자로서 그저 그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존재로서 사용되는 것 자체로 만족하고 소리없이 나누는 것이 우리의 자존감, 인간다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존재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나눔의 의미이다.

우리는 나눌 수 있는 존재라는 그 자랑으로 간다면, 우리는 우리의 우리됨을 잊고 또 교만의 자리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것은 또 우리를 드러내는 나눔이 될 것이며 그것은 결국 다른 사람의 인간됨에 상처주는 길로 갈 것입니다.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우리를 들어내려고 합니다.
우리의 욕망은 늘 우리 자신을 드러 내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존감을 채우려 하고 드러내려고 하고 우리의 자존감을 다른 사람들의 것 보다 우월한 위치에 올려 놓으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자존감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자존감을 다치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존감은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스스로 채울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자존감을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을 때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타락으로 상처를 받고 우리의 욕심으로 만족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였고,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고 빼앗김으로 말미암아 그 상처는 깊어지고 가고 있기에
우리는 그 상황에서 구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힘을 벗어나 있습니다.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 구원을 베풀어 주시길 바라야 합니다.

Friday, August 2, 2013

고린도전서 090 /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 고전 15:1-8 / 1993.06.02

주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살아나셨다는 이 핵심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을 보는 눈과 하나님을 보는 눈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거룩한 것과 경건에 속한 것과 생명에 속하는 것과 은혜와 자비와 용서와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만 오며 인간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에게 더 이상 기대를 품고 있지 않아야 되고, 그래서 실망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에 대하여 기대를 하지 말고, 세상에 대해서 그래서 절망하지 마십쇼. 그리고 세상을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어서 하나님께서 그가 하시는 거룩한 뜻을 이루시고야 말며 그의 은혜와 사랑을 절대로 유보하는 적이 없다는 것을 믿고 그 앞에 엎드려 우리 하나님앞에 구해야 하는 것들로 하나님앞에 나아가는 일을 쉬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의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나아가지 마시고, 하나님을 세상에 끌어 들이지 마십쇼. 여러분의 벼슬자리와 여러분의 건강과 행복을 위하여 하나님을 끌어 들이지 마십쇼. 여러분이 영적으로 구해야 할 모든 일들을 세상것으로 바꾸지 마십쇼. 이것이 핵심입니다. 신자들을 포함하여 현대인들의 최고의 비극이 무엇입니까? 모두가 자기 욕심에 놀아나는 것입니다. -박목사님 설교중에서-